나의 겨울이야기

관리자
2024-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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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2.23 금


【나의 겨울이야기】

인생의 사계를 살며 지난 시간을 복기하다가 내가 놓친 것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이미 겨울인데 나는 여전히 가을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잠깐 사이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갔는데 그 순간을 놓친 것이지요. 그래서 여전히 ‘내 인생은 가을이다’는 착각 속에 살았던 것입니다.


병실에 누워 조용히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니 불현듯 ‘겨울’입니다.


무엇 때문에 몰랐을까요? 장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계절의 대 전환을 왜 몰랐을까요? ‘겨울’이란 글자 위에 두꺼운 책 한 권을 덮어두었습니다. 마주하기 무서워 눈에 띄는 ‘겨울’이란 단어를 모두 박박 벗겨내었습니다. 겁나 쎈 척하며 살았지만 겨울에 살기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런 내면의 어두운 감정이 겨울을 외면하고 스스로 지웠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인생사계에 존재하는 겨울을 내 삶에서 보지 못했던 이유입니다. 두려움은 겨울이란 단어를 지워 가을에서 겨울로 전환되는 시점을 놓치게 만든 것이지요.  


그러다가 1월 2일 경희의료원 입원 상태에서 주치의 맹치훈 교수가 “양민철 님, 지금 건강 상태로는 사용할 항암제가 없습니다. 이대로 몇 개월 버티기 어렵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내 인생에 붉은 노을 같은 찬란한 나의 가을은 산산히 부서졌습니다. 


완전한 나의 주치의 여호와 라파 나의 하나님께서 맹치훈 교수를 통해 “이 친구야, 지금 겨울이야!” 이것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래서 가볍고 새롭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이미 겨울인데 가을이라 착각하며 살았으니 무겁고 복잡했습니다. 현실과 생각이 잘 맞지 않았던 것이고요. 억지로 꿰맞춰 사는 일은 얼마나 피곤한 일입니까. 확실히 겨울입니다. 이것을 알려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지금 겨울에 삽니다. 


밖이 춥습니다. 외출을 줄여야겠지요. 폭넓게 많은 사람을 만나고 사귀기보다 ‘정겨운 사람들’과 함께 정을 나누며 오손도손 살아야 겨울스럽습니다. 


답답할 때에는 밖이 내다 보이는 따뜻한 창가에 앉으면 됩니다. 두 손으로 머그잔을 감싸안아 보세요. 몸과 맘에 찾아온 냉기가 스르르 녹을 거예요. 뜨거운 머그잔의 열기가 온 몸에 흐르며 누군가 나를 안아주는 듯한 따뜻함을 경험할 거예요. 


여름의 행복은 내가 산에 있고 바다에 있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있고 많은 시선들 가운데 있는 것이라면, 겨울의 행복은 그것들이 나를 찾아와주고 내 안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창가에 앉기만 해도 나를 찾아와 주는 지난 계절의 행복들이 있습니다. 따뜻한 머그잔을 두 손에 쥐고만 있어도 누군가 나를 안아주는 듯합니다. 신비롭고 놀랍습니다. 


이타적이며 활동적인 사람에게 겨울은 축복입니다. 


노마드족도 겨울엔 이동을 자제하고 안전한 곳에 정착하여 체온을 유지하며 몸을 보호합니다. 이제 겨울이니 그렇게 해야겠지요.   


겨울엔 내장을 따뜻하게 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곰치국은 흐물흐물 입안에 녹아없어져 처음에 식감 때문에 오해를 받지만 구수하고 깊고 얼큰한 맛으로 인해 한 번도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는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맛있는 김치만 있으면 누구든지 곰치국을 잘 끓일 수 있습니다. 


잘익은 김치에 군고구마, 집에서 만든 온 콩국수, 속을 시원하게 하는 김치 콩나물 국밥, 온갖 재료가 잘 어우러진 비빔밥은 언제나 만족스럽습니다. 열무냉면에 피가 얇은 고기만두를 얹어먹을 땐 뜨거운 사골육수가 있으면 최고입니다. 만두를 으깨어 전골로 만들어 먹는 것도 좋습니다. 겨울엔 속이 따뜻하고 든든해야 합니다. 


여기에 나의 소중한 커피친구 비알레띠 모카포트로 내린 묵직하고 깊고 구수한 맛의 에스프레소를 더하면 눈덮인 산장에 앉은 기분이겠습니다. 행복을 위해 따로 멀리 갈 필요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겨울은 추워! 그래서 불행해! 이것은 편견입니다. 겨울은 계절의 끝이야! 초라하고 외롭지! 관심 밖 인물로 버림받은 시간을 살아야 하는 게지! 이 또한 편견입니다. 


북유럽국가 핀란드는 일년 중 절반이 겨울입니다. 하루 중 18시간이 밤입니다. 이런 나라는 사계 중 겨울이 중심입니다. 그들은 겨울의 기나긴 밤을 따뜻한 커피잔과 함께 버텨왔습니다. 일인당 커피 소비량이 세계 최고라고 해요. 평균 하루 아홉 잔을 마신다고 합니다. 추운 계절이 지배하는 열악한 조건에서 그들이 찾았던 돌파구는 ‘따뜻함’이었습니다. 


한 때 그림 그리던 시절에 여덟 폭 산수화를 자주 그렸습니다. 병풍 한 벌은 대개 봄 두 점, 여름 두 점, 가을 석 점, 겨울 한 점을 그립니다. 간혹 이 원칙을 깨는 주문을 받곤 했습니다. 나의 병풍은 계절을 어떻게 구성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봄 한 점, 여름 두 점, 가을 두 점, 겨울 석 점으로 구성할 생각입니다. 가을 그리기를 마쳤으니 예쁘고 착하고 아기자기한 ‘따뜻한 겨울’을 그릴 생각입니다.


겨울엔 ‘불’이 중요합니다.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더운 여름엔 그늘에 앉기 좋아하고 추운 겨울엔 난로가에 모입니다. 온 몸을 녹여주는 따뜻함이 좋거든요. 나의 겨울이 따뜻했으면 좋겠습니다. 겨울을 만난 사람들에게 ‘따뜻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고 혹한의 계절에도 따뜻하게 사는 지혜를 나누고 싶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나의 겨울에도 함께 하십니다. 



경희의료원 8층 암병동 무균실

양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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