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큐메니안] 양민철 목사 민주화운동 역사산책기 2018.6.4

관리자
2018-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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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있는 역사책이 되어야 한다!”

양민철 목사 민주화운동 역사산책기

양민철 | 승인 2018.06.04 22:47 


지난 월요일(5/21) 화창한 봄날에 명동과 남산 일대를 걷는 뜻 깊은 산책을 다녀왔습니다. 기독교 사회선교 단체인 ‘고난함께’(사무총장 진광수 목사)는 ‘홍승표 박사와 함께하는 민주화운동 역사 산책’[서울의 봄]을 기획하였고 참가자 25명과 함께 한국의 근현대사 유적지를 둘러보았습니다.


오전산책

오전 10시에 시작한 역사 산책은 1987년 6월 항쟁의 중요한 무대가 되었던 명동 향린교회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대다수 교회들이 신군부의 폭압에 저항하기를 포기했던 시기에 개신교 내 저항의 불꽃이 되었던 역사적 장소는 허름한 건물에 불과했습니다. 건물 입구에 설치된 ‘6월 민주항쟁 기념비’ 동판 상단에 “정의를 심어 평화의 열매를”이라는 문구가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초기 한국교회는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영향을 받아 교회와 사회를 이분법적으로 분리하여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에 대해 침묵했습니다. 이런 풍토는 오늘날까지 이어져서 더욱 고착화되었습니다. 대다수 교회가 그런 상황에서 “정의”와 “평화”를 말하며 독재 권력에 항거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정의롭게 행동하는 교회가 있었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럽습니다.

역사에 산책 일행은 영락교회로 이동하였습니다. 1945년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영락교회는 초대 담임목사의 명성만큼 유명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개척설립자 한경직 목사는 한국교회가 낳은 성자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세상을 떠난 후에도 객관적 잣대로 냉정하게 평가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살아있는 종교권력입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서북청년단’은 영락교회 안에서 자생적으로 결성된 것으로 파악이 됩니다. 평양을 중심으로 서북지역에서 피난 내려온 사람들이 영락교회를 이루었고 애국하겠다는 청년들이 일어나 ‘서북청년회’를 결성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1948년 이승만 세력에 의해 제주도에 투입되었고, 양민들을 빨갱이로 간주하여 학살을 자행하는 일에 선봉에 섰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서북청년단은) 우리 교회 청년부가 중심이 돼 조직했시오”라고 자랑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교회 대표적 흑역사입니다. 지금도 4.3사건을 몸소 겪은 제주도민들은 개신교에 대한 강한 불신과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1991년 종교계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 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신사참배 행적에 대해서는 자백하며 반성하였으나 제주도민 학살을 애국적 행위로 간주하여 청년들을 독려했던 범죄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성자의 반열에 올려놓고 칭송하는 것은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을 외면하는 것이며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는 일입니다.

우리 일행은 영락교회 탐방 후 길 건너 명동성당 가톨릭회관 건물 앞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건축가 김정수 선생의 설계는 수직적 단순미와 평등사상을 담았습니다. 수직으로 올라간 건물의 상단은 별도의 구조물이 없이 동일한 높이의 수평선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딱딱한 현대식 건물처럼 보이지만 ‘단순성’과 ‘평등사상’을 담아낸 설계에 기초하였습니다.




그는 가톨릭회관과 함께 국회의사당도 설계하였습니다. 그의 설계는 파르테논 신전에 착안하여 건물 상단을 수평적으로 구성하였습니다. 민의의 민주주의를 반영한 중요한 의미를 담았으나 당시 정치인들에 의해 수평적 상단 위에 ‘통치’의 의미를 담은 ‘돔’을 설치하여 본래 설계자의 의도에서 크게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옵니다. 우리나라 입법부가 국민 위에 존재하는 특별한 사람들의 집단이 아니라 사실을 늘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의 뜻을 저버리는 국회는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삼일절 기념식은 역사적 의미가 깊습니다. 이날 문익환 목사가 작성한 ‘민주구국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 선언서는 윤보선·김대중·함석헌·정일형·김관석·윤반웅·문익환·문동환·이문영·안병무·서남동·이우정·은명기 등 12명이 서명하였습니다. 문 목사가 작성한 선언문 가운데 ‘통일’에 대한 주장은 눈여겨 볼 대목입니다.

“민족통일은 지금 이 겨레가 짊어진 지상과업이다. 5천만 겨레의 슬기와 힘으로 무너뜨려야 할 절벽이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민족통일을 저희의 전략적인 목적을 위해서 이용한다거나 저지한다면 이는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민족통일의 기회는 남과 북의 정치가들의 자세 여하로 다가올 수도 있고 멀어질 수도 있다. 진정 나라와 겨레를 위한다면 변해가는 국제정세를 유지해가면서 때가 왔을 때 이를 놓치지 않고 과감하게 잡을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때에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 있다. 그것은 통일된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한 최선의 제도와 정책이 ‘국민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대헌장이다. 다가오고 있는 그날을 내다보면서 우리는 민주역량을 키우고 있는가, 위축하고 있는가?” 삼일절 기념식에서 발표된 민주구국선언문으로 인해 박정희 군부독재 세력은 야당 신민당 및 재야의 지도급 인사들을 ‘정부 전복 선동’ 혐의로 대량 구속하였습니다.



명동성당에서 나온 우리는 맞은 편 YWCA 건물 앞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해외 유학파 여성 김활란·김필례·유각경 선생은 YWCA 한국 지부를 설립하였고 여성의 권익을 보호하는 의식을 개몽하는 운동의 필두에 섰습니다. 2인의 여성 지도자 가운데 김필례 선생은 일제의 폭압 가운데서 끝까지 배절하지 아니했습니다.

오전 역사 산책 마지막 코스로 명동에 있는 ‘이시영·이회영 6형제 집터’로 이동하습니였다. 명망이 높은 부요한 집안의 집터에는 이회영 선생의 흉상 하나와 푯돌 하나가 쓸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길은 부를 지키기 위한 부역의 길이 아니었고 모든 것을 내던진 애국의 길이었습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우당 육형제의 결의는 오래 오래 부는 맑은 바람이 될 것이다.”라고 평한 바 있습니다. 부끄러운 양심고백을 합니다. 명동교자에 들러 칼국수를 먹고 명동거리 도시문명의 화려함에 취해 이회영·이시영 6형제 집터를 그냥 지나쳤던 적이 있습니다. 역사를 알았다면 교훈을 얻었을텐데 모르기에 그냥 지나쳤던 것입니다. 역사산책 일행은 지난 역사의 거리를 상상하며 흩어져 식사하였습니다.


오후산책

오후 역사산책을 위해 두대의 차량으로 나눠 탄 일행은 남산 위로 올라갔습니다. 차량에서 내려 백범 광장을 향해 걷는 오르막길에서 비로소 알게 된 두 가지 역사의 진실이 있었습니다. 분명히 애국가는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인데 소나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아카시아 나무와 다른 잡목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얼을 빼앗기 위한 일제의 소행이라고 전해 들었습니다. 남산 오르막길에서 훤히 보이는 서울타워 즉 남산 송신탑은 중앙정보부가 서울을 한 눈에 내려다보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독재자는 사람들과 소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감시하고 통제하고 지배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홍 박사의 안내를 받아 남산 위 백범광장에 앉았습니다. 일제는 조선에서 일본 식민 행정과 황민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조선신궁’을 지었습니다. 열다섯 개의 건물로 구성된 조선신궁은 여의도 공원 두 배 면적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돌계단들이 있었습니다. 일제의 강제에 의해 동원된 조선인들은 그 계단을 밟고 올라와 일본의 건국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메이지 천황에게 참배하였습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삼순이 계단은 일제의 총칼에 저항하기 어려웠던 조선 사람들이 일본의 신에게 참배하기 위해 고통스럽게 올랐던 치욕의 계단입니다. 해방 후 조선신궁은 해체되었고 그 자리에 남산공원이 조성되었습니다. 남산공원은 백범광장과 함께 이등박문을 저격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들어섰습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한국교회의 갈등을 빚었습니다. 신사참배 강요에 순응했던 기독교 지도자들은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해석하였으나, 명백한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저항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장로교 평북노회는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인정하고 결의하였고 전국 23개 노회 가운데 17개 노회가 국가의식이라는 명분 아래 일본의 신들을 숭배하였습니다.

감리교도 1936년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 국민의식이라고 주장하며 신사참배에 가담하였습니다. 개신교 내 권력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의 신들을 섬겼고 군부와 신군부 독재 시대에는 권력에 아부하며 권력에 의해 탄압받던 이웃을 외면하였습니다.



박근혜 정부에서 권력의 눈치를 보던 사람들은 세월호 가족의 아픔을 외면하였습니다. 권력의 눈치를 살피며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종교는 쓸모가 없습니다. 이웃이 없는 신학,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는 종교인들은 사악한 권력에 힘을 실어줌으로 안전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가는 길에 걸림돌이 됩니다. 불행히도 한국교회 가운데 이런 교회들이 적지 않습니다.

1973년 4월 22일, 일제에 의해 신사참배가 강요되었던 조선신궁 타에서 역사적인 부활절 연합예배가 개최되었습니다. 해방 후 한국교회는 기장과 예장으로, 통합과 합동으로, 진보와 보수로 분열되었는데 부활절 예배를 통해 한 자리에 앉았습니다.

하지만 내란음모 기도 협의로 부활절 예배에 참석한 열다섯 명이 검거되었습니다. 검찰은 유신독재를 반대했던 신학생들과 그들의 배후로 주목받았던 목회자들을 주모자로 검거하였습니다.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는 유신에 반대했던 기독교 민주화 운동으로 조명 받고 있습니다.

남산에서 내려오는 기슭에 위치해 있는 숭의학원과 경술국치의 현장인 조선 통감관저와 총독부 옛터를 둘러보았습니다. 조선총독부가 광화문으로 나가기 전에 남산에 있었습니다. 남산 조선통감관저 터는 1910년 8월 22일에 조선의 총리대신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은 현장입니다.

이명박과 오세훈 전 시장은 그 흔적을 없애고 우리의 기억에서 없애려고 했으나 박원순 현 시장 때에 경술국치의 현장을 발굴하여 역사적인 장소로 남겼습니다. 그곳 표석에는 신영복 선생의 글씨로 “일제침략기 통감 관저로 있었던 곳으로 1910년 8월 22일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총리대신 이완용이 강제병합 조역을 조인한 경술국치의 현장”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치스런 역사임에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면 똑 같은 역사가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역사산책 마지막 코스는 옛 중앙정보부 제 6별관이 있던 장소였습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하여 압박과 수탈을 일삼았던 남산 기슭에 박정희 군부와 전두환 신군부의 폭압적 통치 수단인 중앙정보부와 안기부가 있었다는 것은 우연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일제 통치와 독재권력의 통치는 폭력적 수단을 동원하여 국민 위에 군림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통치에 대한 저항이 없이 국가권력을 가지고 국민의 자유와 생명을 유린한 독재권력은 일제와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못된 통치는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 때에도 이어졌습니다. 일제의 권력형 잔재들입니다.

지난 촛불혁명 기간에 1,700만명 국민들은 헌법 1조를 목 놓아 외치며 국민주권을 선포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입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옵니다. 국민을 무시한 권력에 대하여 역사는 준엄한 심판을 보여주었고 이런 심판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국민은 역사의 주체입니다. 제국주의 침략 뿐 아니라 그 어떤 권력도 역사에 눈을 뜬 국민을 이기지 못합니다.

역사 산책 안내자 홍승표 박사에게 “한국교회를 향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를 물었더니 이렇게 답하더군요. “지금 한국교회가 위기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더욱 성경공부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땅’의 문제와 삶을 살아가는 ‘역사’의 문제를 소홀히 합니다. 교회가 역사의 소명을 먼저 알아차리고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행동하기 위해서 성경공부만 하지 말고 역사공부도 해야 합니다.”

민주화운동 역사산책 서울의 봄을 준비한 고난함께 진광수는 목사는 ‘역사산책’이라는 타이틀을 걸게 된 취지를 설명하면서 “우리는 역사를 아는 산 책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역사에 눈을 뜬 깨어있는 국민은 강력한 민주사회의 초석이 됩니다. 또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시대를 여는 주역이 될 것입니다.













홍승표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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